(가)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본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나)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하게
동산만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