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는 문단 생활을 하면서 친형제 이상의 우애를 나누었던 신석초에게도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본부의 부름을 받아 만주나 베이징에 갈대에도 막연하게 “안서처럼 술 마시러 가는 거지 (안서 김억은 술을 마시러 만주 안동으로 가곤 했다.)”하든가 “반도란 지리적으로 답답한 곳이야.”하며 훌쩍 떠났다. 그런 뒤에 언제나와 다름없이 머리를 단정하게 하고 단골 찻집에 나타났다. ⓐ그는 술집에 가 술을 마실 때에도 말을 크게 하지 않았다.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문학 얘기, 시정 잡담을 주고 받았다. ⓑ어쩌다 고향인 안동에 돌아와서도 마을 사람이나 친척들과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여섯 형제들의 집이라고 해서 큰형이 명명한 ‘육우당(六友堂)’에 머무르며 책을 읽거나 난을 쳤다. ⓒ이런 점들로 볼 때, 그는 혁명가이면서 동시에 선비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다) ㉢육사의 문필 활동은 그가 중국에서 귀국하기 전부터 다짐한 무력 봉기에 의한 독립 운동이 좌절되면서 활발해졌다. 처음에는 군사 간부 학교에서 배운 실력을 바탕으로 하여 주로 시사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하였다. ⓓ1934년에서 1936년까지 시 4편, 수필 1편만 발표한 것과 대조적으로 시사 평론은 9편이나 발표하였다. 시사 평론의 관심은 주로 중국의 정치 동향과 농촌 문제였다.
1. 이 글의 내용으로 보아 ㉡과 가장 관계 깊은 것은?
2. ㉢이 활발해진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