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과거 제도는 원칙적으로 천민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어서 양반들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성취동기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을 체제 안으로 유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과거 제도가 원칙적으로는 천민이 아닌 평민에게 개방되어 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일부 특권 양반들에게만 의미가 있었다. 왜냐하면 과거 공부를 위한 경제적 여유와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양반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양반들은 과거 제도 자체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운영하였다. 이는 과거 제도의 폐단에서 잘 드러난다. 소속 파당에서 정권을 잡아 관직을 얻게 되면, 당세(党勢)를 확장하기 위하여 과거를 자주 열어 같은 당인(党人)의 자제들을 부정과 협잡으로 합격시켰고, 또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가리지 않고 마구 등용하였다. 그런데 요직은 한정되어 있고 이를 희망하는 자는 많았기 때문에 당내에 내홍이 일어나 하나의 파당이 다시 여러 당으로 세분화되었다.
이제 반상 제도는 철폐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전통적 신분 계층의 장벽은 무너졌다. 그러나 예부터 내려온 지식의 중요성과 이의 존중, 그리고 이 지식의 소유 계급이 행사해 온 지배권의 체제는 바뀌지 않고 단단하게 그 자리를 굳히고 있다. 지식의 내용이 유교 경전과 중국의 시문에서 다양한 근대 학문의 내용이 담긴 새 경전으로 바뀌었고, 지식 계급도 유교적인 인문 엘리트에서 과학, 기술, 경영, 군사 영역을 포함하는 다양한 엘리트 집단으로 전문화되었으며, 신분 배경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지식에 접할 수 있도록 지식의 문은 열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 계급의 엘리트 의식과 지배적 위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기만 하다. 오히려 지식에 의한 지배의 방식과 체제가 더욱 정교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하며, 지배의 정당성 또한 ‘과학적’ 논리에 기초하고 있을 정도이다.
높은 수준의 학력을 내세우는 지식 소유 계급은 평등 이념을 한결같이 주장하고는 있지만, 동시에 그들은 오늘의 사회를 경쟁 사회, 실력 사회라고 규정한다. 나아가 그들은 세계 정황을 가리키면서 경쟁에서 싸워 이겨야만 살 수 있다며 ‘사회 진화론’의 추종자가 되기도 한다. 신분의 제약 때문에 사회적 상승 이동이 불가능하였던 폐쇄적 불평등의 시대는 지나가고, 신분에 상관없이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상승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게 된 경쟁의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등은 경쟁을 통한 차등, 경쟁을 통한 적자생존의 원리를 믿는 ‘불평등을 향한 평등’이라는 논리 위에 서 있는 셈이다. 이러한 평등 이념은 오늘날의 교육 제도에도 반영되고 있으며 이는 우리 사회의 오랜 가치 이념의 주요 요소와도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