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쳐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시집 동두천, 1979)
<감상의 길잡이>
김명인의 시 세계를 관류하는 시적 원리를 한 마디로 말하면 추억이다. 그러나 그의 추억은 아름다운 과거보다는 고통스러운 기억에 가깝고, 과거의 것이면서도 오늘 속에 선명하게 남아 그의 존재를 구속한다. 상처난 과거로서의 추억이라 하더라도 평생 동안 가슴에 묻어 두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어 치유하려 한다. 그의 얼룩진 추억은 6․25와 아버지라는 두 가지 어둠으로 대별된다. 전쟁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로서는 전쟁으로 훼손된 유년의 체험을 형상화하는 한편, 전쟁이라는 극한 공간 속에서 보호받지 못한 과거의 기억은 아버지로 상징된 절대성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두 가지 어둠은 그의 시를 공간적으로는 변두리 선호 경향을 드러내게 하며, 의식면에서는 서민 또는 하층 민중 지향적 경향을 띠게 하였다. 그의 초기시의 대표작인 <동두천>, <켄터키의 집>, <베트남>, <아우시비쯔>, <영동행각(嶺東行脚)> 등의 시편들이 모두 그 같은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그가 대학을 마친 직후 동두천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잠시 교사 생활을 할 때 만났던 무수한 혼혈아들을 떠올리며 지은 작품으로, 동두천역 저탄더미에 내려 쌓이는 눈을 통해 혼혈아와 같은 소외된 인간의 설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유년의 전후 폐허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태된 허무 의식과 유신 체제라는 70년대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에서 형성된 절망적 현실 의식이 작품에 투영됨으로써 이 시는 과거의 어두운 기억만이 아니라, 현재의 삶도 캄캄한 어둠으로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의 시적 배경인 동두천은 우리 민족에게 일종의 상처와도 같은 도시이다. 동족 간의 비극적인 전쟁에 개입했던 미국 군대가 아직까지 머무르고 있는 그 곳엔 그들을 상대로 몸을 팔아 살아가는 여자들이 있으며, 그들 사이에서는 약소 민족의 슬픔을 자신의 운명으로 안고 혼혈아라는 이름의 불행한 아이들이 태어난다. 시인은 그 도시에서, 그것도 떠나가는 사람과 남는 사람의 운명을 표상하는 기차역에서 저탄더미에 떨어져 내리는 눈을 바라다 본다. 신호등이 바뀌자 서둘러 떠나가는 기차를 보면서 인생도 저렇게 ‘어디론가 / 가고 있는 중’이라는 상념에 잠겨 있다가, 혹시나 군중에서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처럼 ‘파묻혀 흐려’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눈이 아무리 깨끗하다 할지라도 ‘내리는 눈일 동안만’ 깨끗할 뿐, 떨어져 녹는 순간 석탄과 구분되지 않는 진창의 검은 물이 되어 흐르는 것을 발견한 그는 결국 제 아버지들을 따라 바다를 건너가게 될 혼혈아들의 운명이 |